본질적으로 인간은 비밀의 총체다. 가여운 비밀 보따리. 가족의 비밀 세훈x준면 BM 作   밤늦게 출근 준비를 하던 도중 집으로 걸려온 전화는 충분히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김종인씨 보호자 되십니까, 라는 간호사의 단조로운 물음에 그렇다, 라는 단조로운 대답을 했다. 일단 병원으로 오라는 말에 무슨 일인가 싶어 병원의 응급센터 안으로 들어가니, 여러 의약품들이 즐비하게 놓인 한 가운데에 동생이 누워있었다. 주변에 마르지 않은 핏자국이 남아있었고, 전기 충격기도 있었으며, 좌절한 표정의 의사가 동생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제야 조금, 주변의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천천히 동생이 누운 침대로 다가가자, 동생의 얼굴이 조금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눈을 감은채로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동생이 어딘지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멍하니 동생을 보고 있으려니 좌절한 표정의 한 의사가 흰 가운에 피를 잔뜩 묻힌 채로 내게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은 것 같았다. 의사를 보고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려 동생을 보았다. 조금 더 가까이 동생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시선으로 잠든 것 마냥 눈을 감고 단정히 누워있는 동생을 내려 보았다.   나와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는 내 동생. 그는 이미 죽어있었다. 하지만 동생의 죽음이 그다지 슬프지는 않았다. 그냥 조금 충격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간호사 한 명이 내게 다가와 동생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거라며 피가 묻은 봉투를 주었다. 봉투 안에는 만 원짜리 지폐가 몇 장 들어 있었다.   의사의 말로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도중 트럭 운전자가 졸음운전으로 중앙선을 침범했고, 동생은 그걸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부딪혀 하늘을 날았다고 한다. 트럭이 가드레일을 들이 받았을 때 그제야 운전자는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당시에 동생의 옆에 헬멧이 떨어져 있던 것으로 보아 동생은 헬멧을 쓰고 있었고, 그 덕분에 동생은 응급실에 실려 올 때까지 약간의 숨이 붙어있었다고 한다. 그때 동생이 나를 찾으며 제 옷 안에 있는 흰색의 돈 봉투를 꼭 나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안 있어, 동생은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나는 그것이 퍽 놀랍게 여겨졌다. 그리고 그 얘기를 전해 듣는 순간, 아주 잠깐이나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렇게 오토바이 타고 다니지 말라했는데, 결국엔…….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일단 친가 댁에 연락을 하기로 했다. 나 혼자서는 아직 장례 준비를 하기엔 모든 것이 복잡하고 어렵게만 느껴졌다. 외가 쪽에도 연락을 하는 것이 맞겠지만 연락처를 몰랐다. 그 쪽 식구들은 만난 적도 없었기에 더더욱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종인의 휴대폰이라면 연락처를 가지고 있을까 싶었지만 이미 박살난 뒤였다. 문득 우리 집 번호는 어떻게 알았나 싶으면서도, 종인과 나는 서류 상 같이 등록 되어있으니 그것 쯤 이야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장례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찾아 올 조문객 이라곤 친가 쪽 친척들뿐이었고, 종인의 친구들이 누군지도 몰랐고 연락처도 몰랐을 뿐더러 학교가 어딘지도 몰랐기에 올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검정색 상복을 입은 내 모습이 어색해서 몇 번이고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동안 고모들은 나를 보며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이구, 쯧쯧. 어려서부터 부모 일찍 여의고는 하나 남은 피붙이도 일찍 세상 뜨네… 어휴, 불쌍한 것…….”   고모들의 말을 들으며 나는 자조적으로 웃어버렸다. 하나 남은 피붙이라, 고모들은 본인들이 어떤 오류를 범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여전히 이러쿵저러쿵 떠들기 바빴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며 장례식장에서 나와 병원 근처 벤치에 앉았다. 추운 날씨에 객사라니, 너도 참 딱하다. 가만히 중얼거렸다가, 상복 마이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피가 조금 묻은 돈 봉투를 꺼냈다. 동생이 살아 있을 때 얼핏 듣기론 아르바이트를 했다던 것 같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 돈은 그 아르바이트의 대가가 아닌가 싶었다. 새삼 동생이 나를 조금은 챙기려고 했다는 마음이 느껴져 또 다시 무엇인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기분이 묘했다. 내게 무심한 줄만 알았던 동생이 나를 신경 쓰고 있었다니, 어머니는 다를지라도 같이 지내온 세월 때문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나와 내 동생은 어머니가 달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듣기로는 어머니가 나를 낳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 나를 키울 사람도 없거니와, 오랜 세월을 홀아비로 지낼 수는 없어 선을 보고 동생을 낳아준 어머니와 재혼했다고 한다. 그런데 동생을 낳아준 어머니 또한 그렇게 오래 살지는 못했다. 그리고 먼저 간 두 명의 어머니들의 뒤를 따라 아버지도 이른 연세에 돌아가셨다. 결론적으로 따지고 보면 나와 내 동생은 중학생 때부터 둘이서 지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와 내 동생 사이에는 알 수 없는 벽이 하나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사생활을 절대 침해하지 않기로 무언의 합의를 본 상태였기에 서로 무엇을 하는지 관심이 없었다. 그나마 중학생 때는 일 년 이나마 같은 학교였지만 내가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는 공통된 연결고리라고는 서류상에 같이 기입 되어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동생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저 아침밥을 차려놓고 먼저 집을 나오고, 필요로 하는 것이 있으면 아침상에 돈도 같이 올려놓고 그럴 뿐이었다. 형제의 정 이라는 게 있기나 했던가 싶을 정도로 우린 서로에게 참 많이 무관심 했었다. 그리고 장례식 준비를 하며 나는 동생에게 무관심했음을 더욱 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동생이 어느 고등학교에 다니는지, 동생의 담임이 누구인지, 동생이 누구와 가장 친한지, 어느 것 하나 동생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동생의 장례식은 정말 조촐하게 치러졌었다. 화장터에도 나와 할머니와 삼촌, 이렇게 셋이서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동생의 마지막 길은, 참 쓸쓸했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혼자서 집에 있으려니, 조금은 동생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원래도 자주 집을 비우던 동생이었는데 그때와는 느낌이 확 달랐다. 이 집이 원래 이렇게 차가웠나 싶을 정도로 찬 기운이 가득했다. 집의 한 가운데에 있던 나는 동생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유품 정리를 하지 않아서 동생 방은 생전 그대로였다. 사람의 온기를 잃은 방은, 소름끼치도록 텅 비어 보였다. 분명 동생의 물건들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때 옥탑방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늦은 밤에 누가 찾아온 건가 싶어서 누구냐고 소리치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잘 못 들은 건가 싶어서 갸웃, 하면서도 호기심에 문을 여니, 무심한 표정의 남자가 서있었다. 나와는 전혀 안면이 없는 인물이었기에 동생의 친구인가 싶어서 종인이 친구냐고 묻자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인인데요.”   그것은 내가 살면서 처음 안, 동생의 비밀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   나는 일단 동생의 애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를 집 안으로 들어오게끔 했다. 딱히 내올 것이 없어서 멀뚱히 있으려니, 남자는 자연스럽게 작은 옥탑 방을 쭉 둘러보고는 열려있는 방문을 가리키며 종인의 방이냐고 물었다. 역시, 애인이었던 사람인지는 몰라도 종인의 방을 한 눈에 알아보는 것이 꽤 놀라웠다. 망연히 고개를 끄덕이니 남자는 종인의 방으로 쏙, 들어갔다. 나는 멍하니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있었고 남자는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남자가 동생의 방에서 나왔다. 약간의 울음기가 남아있는 얼굴을 한 채로 말이다. 그 순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으려니, 남자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남자와 같이 바닥에 앉았다.   “종인이의 형, 김준면 맞죠?”   “응. 내가 김준면 인데.”   “됐네요, 그럼. 저는 오세훈 이라고 합니다. 종인이랑 동갑이에요.”   “아, 반가워. 그런데 여긴 어떻게…….”   “종인이 부탁으로 왔어요. 김종인 걔, 라이더로 아르바이트 했는데 항상 위기의식이 있어서 저한테 집 주소랑 알려주면서 자신이 만약에 오토바이 타다 죽으면 저더러 여기서 형이랑 같이 살아 달래요. 자기네 형은 혼자서 못 지낸다고.”   “…….”   “전 그럴 때면 농담하지 말라고 하거나, 같이 죽어 버릴 거라고 했어요.”   “…….”   “막상 김종인이 실제로 죽고 나니까, 어쩌면 마지막 부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찾아 왔어요.”   “종인이 죽은 건 어떻게 알고?”   “김종인 일하던 곳에 연락하니까 교통사고 나서 죽었대요. 그래서 알았죠.”   세훈의 말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는 12라는 숫자를 지나고 있었다. 오늘도 일하러 가기엔 늦은 것 같은 생각에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했다. 그리고 세훈이라는 남자는, 내가 딱히 말해주지 않았어도 알아서 동생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방으로 들어왔다. 자리에 누웠지만 정신이 점점 더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저 남자가 동생 종인이의 애인이다. 동생은 남자다. 그러니까 내 동생은, 동성애자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무엇인가에 깜짝 놀란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동생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여자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워낙에 서로 대화란 것을 잘 안 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어쩌면 그것은 대화를 안해서가 아닌, 동생이 동성애자였기에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옆방에 있는 동생의 애인이란 남자도 결국은 동성애자라는 소리였다. 나는 다시 자리에 드러눕고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하지만 자꾸만 생각은 생각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동생의 행동들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끔 했다. 어쩌면, 동생이 외박을 하던 날엔 세훈이란 남자의 집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뒤의 이야기가 떠올라 머리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일종의 배신감과도 같은 감정이 느껴졌다.   동생의 죽음은, 내게 조금 다른 의미의 심란함을 안겨주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새벽녘에 잠이 들었다가 일어나니 평소에 일어나던 시간에서 한 시간도 더 넘게 지나있었다. 문득 세훈이란 남자가 동생과 동갑이라면 지금 학교에 가야한다는 생각이 앞서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스트레칭으로 굳은 몸을 풀어주고 방에서 나왔다. 간단하게나마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꺼내고 밥을 퍼서 상을 차리고 나니 동생의 방에서 세훈이 나왔다. 그는 어제 입었던 옷 그대로의 상태였다. 짐작컨대, 저 녀석 또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멍하니 밥상 앞에 앉아있는 세훈에게 먼저 씻고 나오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 덧붙여 동생의 옷이라도 상관없다면 동생의 옷을 가져가서 갈아입고 나오라고 하니, 세훈은 여벌의 옷이 있다고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대화를 하다 보니 세훈이 동생의 방에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무엇인가 잘 못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했다.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머리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종인에게 그랬듯이 세훈에게 국이라도 끓여줄 요량으로 항상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북어를 꺼내 프라이팬에 볶고 미리 끓이고 있던 물이 담긴 냄비에 볶은 북어를 넣었다.   종인이는 아마 제 형인 나를 평범한 대학생쯤으로 알고 있겠지만, 나는 대학을 가지 않았고, 밤마다 칵테일 바에서 일을 했다. 그래서 나의 출근 시간은 밤늦은 시각이었고, 집에는 항상 숙취 해소를 위해 북어나 콩나물 같은 것들을 사다 놓았었다. 종인은 그것을 눈치 챈 것 같진 않았지만 말이다. 어찌 보면, 나와 동생은 서로에게 비밀이 하나씩 있었으니 퉁 친 셈이었다. 동생에게 가지고 있던 알 수 없는 배신감이 아주 조금 사라졌지만 여전히 미약하게 남아있었다.   북어 국이 거의 다 끓어갔을 때,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세훈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부엌으로 왔다. 말이 부엌이지 현관과 거실과 부엌의 경계가 모호한 공간이었다. 밥상 앞에 세훈이 앉자, 나는 세훈의 몫의 국그릇을 먼저 밥상 위에 놔두고 그 다음에 내 몫의 국그릇을 가지고서 그 맞은편에 앉았다. 침묵이 흘렀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은 그런 침묵이었다. 말없이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등교 시간이 훨씬 넘어선 것을 깨닫고서 세훈을 보니 세훈은 전혀 조급해하는 모습 없이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의아한 마음에 세훈에게 학교에 안가냐는 말을 하니, 세훈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말을 했다.   “퇴학당했어요.”   “아, 그렇구나. 그럼 종인이는 어떻게 알게 된 거야? 같은 학교였어?”   “네. 같은 학교, 같은 반이었죠.”   “그래…….”   “그리고 김종인도 같이 퇴학당했어요.”   뒤이어 나온 세훈의 말에 깜짝 놀라 세훈을 보니, 세훈은 형이라는 사람이 그것도 몰랐냐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분명히 동생은 아침마다 교복을 챙겨 입고 학교에 등교를 했다. 이따금씩 학교에서 준비물이 필요하다고 하며 돈을 받기도 했고, 문제집 값을 받아 가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런 동생이 퇴학을 당했다니? 전혀 알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나는, 생각보다 더 동생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는 생각에 또 다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와 허탈함이 느껴졌다.   2 : 1   동생이 내게 숨긴 비밀이 하나 더 많아졌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보다 더 많은 비밀이 동생을 둘러싸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은, 학교 안 가요? 대학생이라고 들었는데.”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를 하는 내게 꽂히는 질문으로 인해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마저 설거지를 했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사이 세훈은 굳이 대답을 요구하고서 한 질문은 아니었는지 재촉하며 되묻진 않았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세훈이 틀어 놓은 텔레비전의 잡음과 물소리만 흐르고 있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낸 뒤에, 뒤를 돌아 텔레비전을 보는 세훈을 쳐다보았다. 짧게 한숨을 내쉰 후에 세훈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담배 있어?” 미성년자인 세훈에게 담배 있냐는 질문이 어울리지 않을 법한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세훈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담배 곽과 라이터가 전혀 어색하질 않았다. 오히려, 어쩌면 예상하고 있던 행동이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니 이따금씩 동생 종인이가 달고 오던 그 특유의 향이 풍겼다. 아. 나는 그때서야 어쩌면 동생도 담배를 피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잇새로 픽, 웃음을 흘렸다. 내 웃음에 세훈이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꿋꿋이 정면을 쳐다보았다. “나, 대학생 아니야. 대학교 안 다녀.” “…….” “종인이한테 거짓말한 거야. 대학 갈 돈이 어디 있어, 돈 벌어야지. 그래서 칵테일 바에서 일해, 바텐더로.” “…풉.” 내 말에, 느닷없이 세훈이 웃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 쳐다보니, 손으로 입을 막고서 큭큭, 거리며 웃었다. 뭐야. 나름 진지하게 이야기했는데 웃어버리니 기분이 상했다. 미간을 찌푸리고서 웃는 세훈을 보니, 세훈이 미안하다며 웃는 것을 멈췄으나 입가엔 여전히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그러다 새삼 제일 궁금했던, 동생이 퇴학당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세훈은 한동안 나를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종인, 바에서도 일했어요. 그래서 웃었던 거예요, 형제가 동시에 바에서 일한다기에.” “아아…….” “물론, 종인이가 일하던 바는 조금 성격이 다르지만.” “…설마.” “호스트바. 호스트로 일했어요. 그래서 퇴학당했고요.” “…….” 나는 또 다시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지고 말았다. 그냥 바도 아니고, 호스트바? 역시 예상대로 내가 모르는 동생의 비밀이 점점 드러나고 있었다. 손에 들린 담배가 필터 끝까지 타들어가며 불꽃이 손가락 사이에 닿았다. 멍하니 있다가 깜짝 놀라 급하게 재떨이를 가져와 담뱃불을 껐다. 생각보다 많이 충격을 받은 모습에, 세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종인이, 형이 대학교 안다니는 거 알고 있었어요. 세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세훈을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한 치의 거짓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알고 있었구나. 동생은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있었고, 나는 동생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는 사실이 꽤 부끄러웠다. 생각보다 동생은, 나에게 어느 정도 관심을 가져주고 있었던 것 같아 눈가가 시큰해지기도 했다. 문득 방구석에 놔두었던, 동생이 나에게 꼭 전해달라고 했던 피가 묻은 흰색의 돈 봉투가 떠올랐다. 아, 종인아. 눈물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애써 삼키려 고개를 위로 향하게 들었다가 다시 숙이곤, 내 앞에 놓아두었던 담배 곽에서 담배 한 개비를 또 꺼내 불을 붙이곤 연기를 빨아들였다. 묵묵히 담배만을 피우고 있을 때, 세훈은 줄곧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끝까지 모른 척 하려다가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어서 뭘 쳐다보냐며 세훈에게 물으니, 세훈은 대답 없이 그저 나를 보기만 했다. 머쓱해져서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며 담배 연기를 마지막으로 빨아들인 뒤에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세훈이 내 손목을 잡아 다시 자리에 앉게끔 했다. 무슨 상황인지 인식하기도 전에 손목을 잡지 않은 다른 쪽 손이 내 턱을 강하게 쥐고 잡아 당겼다. “담배 피우는 모습, 굉장히 섹시한데요?” “무, 무슨 소리를…….” “키스해도 되요?” “……조, 종인이랑 어떻게 사귀게 된 거야?”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얼굴을 차마 밀어내지 못하고 종인이의 이야기를 꺼내며 화제를 돌리자, 그제야 세훈이 뒤로 물러났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마른 입술을 혀를 내어 축이니, 세훈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먼저 사귀자고 했어요.” “그래?” “종인이는 자신이 어디서 일하는지 알려주면서 거절했는데 제가 계속 쫓아다녔어요.” “아…….” “이쯤하면 이야기가 되었죠?” “어, 응. …참, 난 일하기 전까지 자야해서, 밤늦게 출근하는 거니까.” “잘 자요.” 이야기가 끝나고 급하게 세훈에게서 멀어져 방으로 들어왔다. 문가에 기대어 방금까지 들었던 이야기들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호스트바에서 일하던 동생, 그리고 그런 동생조차 좋다고 쫓아다니던 남자. 돈 봉투는 동생이 호스트바에서 일하고 난 뒤에 받은 돈일 것이다. 점점 밝혀지는 동생의 비밀들이, 동생을 더욱 딱하게 만들었다. 호스트바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퇴학당해야 했던 동생, 그리고 추운 날 교통사고로 객사하고만 동생. 그런 동생에게 조금의 관심을 주지 못했던 내 자신이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동생과 나는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여기며 벽을 만든 것은, 나 혼자만 해왔던 일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동생은 끊임없이 그 벽을 허물고자 했지만, 나는 그 벽을 더욱 더 견고하게 만들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같은 중학교에 다니던 일 년의 시간동안에도 나는 되도록이면 동생과 마주치려 하지 않았고, 일학년 교실에 가야할 일이 생기면 친구에게 대신 부탁하거나, 최대한 동생 반을 지나치지 않는 쪽으로 다녔었던 것 같았다. 조금은 뒤늦게 동생을 생각하는 내 진심이 생각이 났다. 나는, 나와 어머니가 다른 동생이 싫었다. 이게 내 진심이었다. *** 땅거미가 지고 해가 저물 즈음에 방에서 나왔다. 불 꺼진 거실이 차갑도록 고요했다. 아무도 없는 건가 싶어서 살며시 동생의 방문을 열어보니 세훈은 어딜 간 건지 보이질 않았다. 다시 거실로 나와 빙 둘러보니 저녁상이 차려져 덮개로 덮인 채 있었다. 밥 상 앞에 주저앉아 덮개를 걷어내니 아침상과는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몇 가지 반찬이 더 놓여있었다. 무엇인가 싶어서 밥상을 보다가, 숟가락 옆에 종이쪽지가 놓여있기에 쪽지를 펼쳐보았다. 못난 글씨체로 세훈이 장을 봐서 밥상을 새로 차렸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대충 보니 멸치볶음과 계란찜 같은 것이 세훈이 만든 것 같았다. 곧장 젓가락을 들어 먹어보니 맛이 꽤 좋았다. 고마운 마음에 씻고 나와서 밥을 먹고 밖으로 나왔다. 날이 굉장히 추워서 입고 있는 코트 자락을 더욱 여미며 가게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장사 준비를 하는 사장님과 다른 종업원들이 보여서 눈인사를 주고받은 뒤, 탈의실로 들어가 겉옷을 벗어두고 검정색의 앞치마를 허리춤에 맸다. 준비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 가게 정리를 도왔다.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하기 전 즈음이 되서야 같이 바텐더로 일하는 찬열이 도착했다. 사장님은 눈도 왔으니 그냥 넘어간다고 했고 찬열은 죄송하다고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급히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 강렬한 사운드의 클럽 음악이 틀어지고, 서서히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와 찬열은 앞에 앉아 있는 여성 손님들에게 영업용 미소를 지어주며 쇼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나와 찬열이 하는 칵테일 쇼는, 이따금씩 나와 찬열의 칵테일 쇼를 보기 위해 가게를 찾는 손님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한참 칵테일을 만들어주고 있을 때, 웨이터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그는 어떤 고등학생이 나를 찾아 왔다고 하며, 들여 보내달라는 것을 억지로 막고 있다고 했다. 문득 세훈이 떠올라 웨이터의 뒤를 따라 가게의 입구로 가니, 정말 세훈이 그 자리에 있었다. 캐주얼 양복을 입은 세훈은 내가 오자 화색이 돌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웨이터를 보았다. 나는 웨이터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세훈의 옷깃을 잡고 바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그냥, 집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형이 여기로 들어가기에 대충 짐작 되었죠.” “그렇다고 무턱대고 찾아 와? 미쳤지 정말. 얌전히 여기 앉아 있어. 손님들이랑 말도 섞지 말고.” “알았어요. 형만 보고 있으면 되죠?” “그러던지 말든지.” 세훈을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히고서 자리로 돌아왔다. 혼자서 손님들을 상대하던 찬열은 내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그 앞에 앉아 있는 세훈을 가리키며 누구냐고 물었다. 이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동생의 친구라고 대답한 뒤 얼음 덩어리를 들고 구형으로 조각하기 시작했다. 팔을 걷어 부치고 컵에 들어가기 알맞게 얼음을 조각한 뒤에 컵에 담아내고서 그 위로 양주를 따라 담아 여성 손님에게 웃으며 건네주었다. 그 동안에 세훈은 정말로 얌전히 앉아서 나를 보고 있었다. 말썽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은 참 좋았으나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세훈을 의식하느라 몇 번이고 컵을 돌리는 손이 박자를 잃고 삐끗했었다. “괜찮아? 계속 실수하네.” “아… 괜찮아. 며칠 쉬었더니 이 모양이네.” “잡는 손부터 잘 못 됐다. 이렇게, 너 원래 이렇게 시작했잖아.” 실수가 계속되자 보다 못한 찬열이 가까이 다가와 손 위치를 바로 잡아 주었다. 손 위치가 잘 못 된 것도 모른 채로 세훈까지 의식하다보니 실수가 계속 되었던 것 같았다. 찬열에게 고맙다고 말을 하니 찬열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제 자리로 돌아갔다. 손님들을 응대하다가 조금 발길이 뜸해진 틈을 타서 상큼한 과일 음료와 더불어 알코올이 살짝 들어간 칵테일을 만들어 세훈의 앞에 놓아두었다. 제게 내밀어진 칵테일을 보던 세훈이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서 그 앞에 서있으니 세훈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세훈의 가까이로 상체를 숙이니 그제야 말이 들렸다. “저 형이랑 많이 친해요?” “응, 왜?” “단순히 친한 사이?” “응. …야 잠깐, 너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내 동생처럼 게이가 아니야.” “맞는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죠, 세상 사람들의 80퍼센트는 양성애자라는데.” “내가 양성애자건 이성애자건 너랑 무슨 상관인데?” “확인 해볼래요?” 세훈의 물음에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쳐다보았다. 장난스러움이 묻어나오지 않는 표정에 오히려 당혹스러워서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는 찰나 또 다시 세훈에게 뒷목을 잡혀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눈동자만 굴려 제일 먼저 찬열을 살피니 찬열은 제 앞에 있는 손님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나를 본 세훈이 조소를 흘렸다. “아무 사이 아니라면서 제일 먼저 눈치 살피는 건 뭐예요?” “너 같으면 남자 둘이 이러고 있는 게 정상적으로 보이겠니?” “이상할 건 또 뭐 있겠어요.” “…오세훈, 장난칠 시간 없어. 여긴 내가 일하는 곳이고 난 일하던 중…….” “저 지금, 키스할 겁니다.” 미처 밀어낼 틈도 없이 세훈이 내 뒷목을 조금 더 끌어당기며 가까이 다가왔다. 당황스럽기 만 한 이 상황 속에서 떠오른 것은 세훈은 내 동생 종인의 애인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코끝이 맞닿았을 때, 세훈은 내리깐 시선을 들어 내 눈을 보았다. 그 시선에 알 수 없는 욕망이 담겨져 있었다.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감지했지만 차마 밀어낼 수가 없었다. 숨소리조차 크게 들릴 정도로 가까워진 사이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렸다. “준면아 너 빨리…….” 등 뒤에서 들린 찬열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감았던 눈을 떴다. 그제야 내 뒷목을 붙들고 있던 세훈의 손에 힘이 빠지고 나는 벗어날 수 있었다. 세훈은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리며 주머니에서 담배 곽과 라이터를 꺼냈다. 등 뒤에 서 있을 찬열 때문에 뒤를 돌아보지 못한 채 앞치마 자락만 꾹 쥐고 있다가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서 뒤를 돌았다. 찬열은 약간 놀란 상태로 나와 세훈을 번갈아 보았다. “칵테일 쇼, 할 차례야.” “어… 갈게.” “…참, 입술 깨물지 마. 망가지면 보기 흉해.” 찬열이 시선은 세훈에게 둔 채로 내 턱을 들어 올려 고개를 들게 하더니 엄지로 내 입술을 살살 문질렀다. 그 행동에 담겨진 의중을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어서 찬열을 올려다보고만 있으려니, 찬열이 세훈에게 두었던 시선을 거두고 나를 내려 보며 웃어보였다. 그 사이로 세훈이 피우는 담배 향이 퍼져 왔다. 아찔한 그 향을 맡으며 칵테일 쇼를 선보일 자리로 돌아갔다. 찬열이 내 뒤를 따랐고, 등 뒤로 끈질기게 어떤 시선이 따라 붙는 것을 느꼈지만 끝내 모른 척 했다. 또 잠깐의 휴식이 주어져 세훈이 앉아있을 자리로 오니, 비어있는 칵테일 잔만 있을 뿐, 세훈은 보이질 않았다. 때마침 그 앞을 지나가는 웨이터를 불러 세워 세훈의 행방을 물으니, 칵테일을 다 마시고서 담배만 피워대다가 나갔다고 했다. 그 말에 알았다고 답한 뒤,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세훈과 찬열의 행동으로 인해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머리가 아팠다. 코끝에는 여전히, 향이 독특했던 세훈의 담배 향이 강하게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일이 끝나고 집으로 왔을 땐, 집안엔 아무도 없었다. 현관에 당연히 있을 것이라 여겼던 세훈의 운동화가 보이지 않았고, 시린 새벽의 싸늘함만이 가득했다. 몸을 부르르 떨며 차가운 바닥을 밟으니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일단 집안에 가득한 냉기부터 없애야할 것 같아 보일러를 가동 시켰다. 위잉, 하고 보일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방으로 들어가 겉옷을 벗어 걸어둔 뒤에 다시 거실로 나왔다. 잠시 거실 한 가운데에 서서 중요한 무엇인가를 빼먹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서성거렸다. 문득, 바닥에 어질러진 옷가지 같은 것들이 눈에 보여 한데 모아 세탁기에 집어넣고, 내 방에서도 빨랫감을 가져와 모조리 세탁기에 넣어 세탁기를 돌렸다. 고요한 집안에 보일러가 돌아가는 소리와 세탁기가 작동하는 소리가 뒤섞였다. 그래도 뭔가 시원찮아 이참에 장례식 이후로 하지 않았던 청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하게 텔레비전 주변에 놓인 물건들을 정리하고 물티슈를 뽑아 먼지를 닦아 내었다. 그 위로 다시 얹어지는 하얀 먼지가 보였지만 그것들을 다시 닦아내어봤자 또 다시 얹어질 것이란 걸 알기에 그냥 넘어갔다. 부엌 옆에 있는 다용도실의 문을 열어 청소기를 꺼내왔다. 집안에 청소기 소리가 울리니, 세탁기가 돌아가며 나오던 잡음이 묻혔다. 꽤 열심히 거실을 쓸고 닦고 하다 보니 땀도 나는 것 같았다. 청소가 끝나고 시계를 보니 동이 터오고 있었다. 퇴근한지 한 시간 가량 지난 것 같은데, 그럼에도 세훈은 집에 오지 않았다. 청소에 집중하느라 신경 쓸 틈이 없었지만, 청소가 끝나고 나니 세훈이 없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고작 이틀 동안 같이 있던 사람인데 빈자리가 이렇게나 크다니, 놀랍기도 했지만 무엇인가 불편해 인상을 찌푸리고선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다 문득 아랫입술을 살살 문지르며 입술 망가지면 보기 흉하다고 말해주던 찬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줄곧 씹고 있던 아랫입술을 혀를 내어 쓸며, 입을 다물었다. 또 다시 의중을 알 수 없었던 세훈과 찬열의 행동들이 떠올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자꾸만 키스해도 되냐며 묻던 세훈과 유난스럽게도 다정했던 찬열.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허튼 생각을 몰아내었다. 그러다가 청소에 집중하면 다른 것들은 생각할 틈이 없다는 생각에 방으로 들어와 방청소도 시작했다. 줄곧 써왔던 방임에도 불구하고, 낯선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사람 손을 타지 않은 것 같은 낯섦 이었다. 옷걸이엔 옷이 그대로 있었고, 잘 보진 않았지만 꽤 많은 책들이 책꽂이에 있었고, 이부자리도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방엔, 알 수 없는 허전함이 가득했다. 청소할 것도 없이 청소가 끝이나 버렸다. 찝찝하긴 했어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낯선 찝찝함을 뒤로한 채, 동생 방으로 들어갔다. 동생의 방은 확실히 내 방과 분위기가 달랐다. 분명히 내 방과 같이 옷걸이에 가지런히 정리된 옷들이 있었고, 책꽂이에 일렬로 정리 된 책들이 있었고, 이부자리도 잘 정돈 되어 있었지만 동생의 방이 외려 더 사람 손을 많이 탄 것 같았다. 결론적으로 동생의 방도 이렇다 할 청소할 만 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죽은 이의 물건을 손댄다는 것이, 무엇인가 께름칙하기도 했었다. 어쨌건 간에 동생과 나는 완벽한 타인이라는 생각도 한 몫 하긴 했었다. 대강 방을 둘러본 뒤에 나가려는 찰나, 세훈이 올려둔 것으로 추정되는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사진 속에는 세훈과 종인이, 서로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새삼 처음 보는 것 같은 동생의 웃는 모습에 같이 미소가 지어 지기는커녕 심사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김종인 너는 뭐가 그렇게도 좋아서 웃고 있는 건지. 분명 세훈이 종인을 쫓아다녔다고 했었는데, 그럼에도 이렇게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모습이 징그럽게만 보였다. 호스트로 일하는 동생을 뻔히 알면서도 좋다고 쫓아다녔던 오세훈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동성애자였고, 호스트바에서 호스트로 일했던, 나와 어머니가 다른 동생. 나와는 다른, 완벽한 타인. 사진 속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도 싫었다. 종인을 향해 웃어 보이는 세훈의 사진 위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키스해도 되냐고 묻던 당돌한 세훈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생의 애인이었기에, 입은 거부의 말을 내뱉었지만 막상 밀어내지 못했던 그 얼굴. 액자를 집어 들어 차가운 유리 위로 입술을 맞대었다. 그리고 액자를 보았을 때 눈에 들어온 두 사람의 모습에 짜증이 일었다. 정확히는 그 옆에 있는 동생의 모습이 싫었다. 손에든 액자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쨍그랑, 하는 파열음과 함께 액자 유리가 깨졌다. 그 모습이 마치, 사진에 금이 간 것 같았다. 그것도 동생의 웃는 얼굴위로 무수히 떨어진 유리조각들이 동생의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것 같아 보여, 알 수 없는 희열이 느껴지기도 했다. 더러워, 김종인. 액자의 잔해를 치울 생각은 없이 방에서 나와 내 방으로 들어왔다. 세훈은 여전히 집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액자를 깨트림으로서 이유 모를 승리감에 휩싸여 그것은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세훈이 얼마 안 있어 집에 올 것이라는 자신감에, 뒤틀렸던 심사가 다시 풀어지며 긴장이 이완되었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상 세훈도 여기 올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꽤 자신 있었다. 긴장이 풀리니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눈을 떴을 땐 오후 두시 정도 되어있었다. 덮고 있지 않았던 이불을 덮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세훈이 왔었다는 생각이 들어 황급히 이불을 걷고 밖으로 나왔으나, 덮개로 덮여진 식탁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동생의 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 건가 싶어 동생의 방으로 가니, 그곳에도 세훈은 없었다. 문득 새벽녘에 청소를 하러 들어갔다가 고의로 깨트렸던 액자가 떠올라 바닥을 보니 깨진 액자의 잔해는 이미 치워진지 오래였다. 대신 액자가 놓여있던 자리에는 포스트잇 하나가 놓여있었다. [질투의 또 다른 표현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제 생각이 맞았다면 작전 성공인 듯싶네요. 밥 차려놨으니 먹어요.] 질투일까? 내가 생각하기에도 새벽 즈음에 액자를 깨트린 것은 굉장히 충동적이었다. 이렇다 할 감정의 변화는 없었다고 본다. 다만 동생이 더럽게만 느껴졌고,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기 싫었을 뿐이었다. 음, 이런 걸 두고 질투라고 하는 것인가. 손에 들고 있던 포스트잇을 입술에 대었다. 아득한 잉크냄새와 종이냄새가 맡아졌다. 액자를 깨트린 그 순간부터, 나와 세훈이 조금은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동생의 방은 기분이 나빴다. 내 방과는 달리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은 방. 거울 면에 비춰지는 내 얼굴이, 흉물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놀라, 급히 거울에서 시선을 거두고 포스트잇을 원래의 자리에 붙여놓았다. 방에서 나와 식탁 덮개를 들어 올리니, 반찬의 개수가 조금 더 늘어있었고, 늘 내가 만들던 북어 국이 아닌 김치찌개가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리고 숟가락 옆에 또 다른 포스트잇이 있었다. [매번 같은 것만 먹지 말고 다른 것도 좀 먹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오랜만인 것 같은 제대로 된 식탁 풍경에 괜히 가슴 한 구석이 저릿했다. 어쩌면 동생이 세훈의 집에서 머물다 온 날에도 이런 밥상을 받았을 것 같았다. 난 동생이 요리하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까, 동생은 아마 요리를 못하는 줄로 안다. 식어버린 김치찌개였지만 역시 맛은 좋았다. 세훈이 이렇게 정성들여 상을 차려주는 대상이 동생에서 나로 옮겨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묘한 승리감이 들었다. 어차피 동생은 죽은 사람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동생은 이미 죽었고, 그러므로 세훈과 무엇을 하든 미안해할 이유는 없었다. *** 이전과는 달리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을 하니, 어쩐 일인지 찬열이 먼저 도착해있었다. 밝게 웃으며 찬열에게 인사를 하니, 찬열 역시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놓고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기분 좋아 보이네? 탈의실로 들어가며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대답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장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세훈이 가게로 찾아왔다. 오늘 가게 정리 당번이 나였기에 세훈이 온 것이 매우 반갑기도 했으며, 참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더욱더 반가웠다. 찬열이 남아서 가게 뒷정리를 도와준다고 했지만, 세훈이 왔으니 되었다고 하며 찬열을 먼저 집으로 보냈다. 찬열은 조금 망설이는 기색이 보였으나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가게를 나섰다. 세훈의 시선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찬열의 손에서, 찬열에게로 옮겨가는 동안에 매섭게 변한 것 같았으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사진도 버렸어요.” “……그래?” “액자를 깨트려버릴 정도로 싫어하는 것 같아서 말이죠.” “…….” 세훈을 등지고 서 있었기에 세훈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음성에 어린 웃음기에 분명히 세훈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진도 버렸다는 말에 내심 기분이 좋아져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찾아와준 세훈에게 줄 요량으로 칵테일 컵을 돌리면서도 자꾸 생각이나 비싯비싯 웃음이 나왔다. 완성이 된 칵테일을 컵에 담고 입 꼬리를 씰룩이며 겨우 표정관리를 한 뒤에, 뒤를 돌아봐 세훈에게 칵테일 잔을 건넸다. 크림과 달콤한 리큐르들이 어우러져 옅은 핑크색의 부드러운 음료 위에 뿌려놓은 가니쉬가 제법 괜찮게 나온 것 같았다. 잔을 집어 드는 세훈을 기대에 찬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달콤한 향내에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한 번 보고는 한 모금 마셨다. 음료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며 일렁이는 세훈의 목울대를 보니 아랫배 쪽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어 묘한 흥분감이 느껴졌다. “어때?” “음… 굉장히 달콤하네요. 저번에 주었던 것과는 달리. 그건 약간 오렌지주스 먹는 기분이었는데.” “아, 데킬라 선라이즈 라고 오렌지 음료와 데킬라가 섞인 거야. 널 보면 그 음료가 생각나서.” “왜요?” “데킬라 선라이즈가 멕시코의 일출을 형상화한 것이거든, 넌 마치 타오르는 태양빛 같아.” “타오르는 태양,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게요. 그럼 이건 뭐예요?” “…비밀. 일단 마셔, 다 마시면 가게 정리하게.” 설거지를 핑계로 세훈에게서 등을 돌렸다. 지금 느끼는 것들이 확실해지면 그때 오늘 세훈에게 준 칵테일의 이름을 알려줄 생각이었다. 물론, 세훈이 마음먹고 이름을 찾으려고 한다면 못 찾을 것도 없는 꽤 유명한 칵테일이긴 했었다. 하지만 어쩐지 세훈이라면 굳이 알아볼 것 같진 않았다. 세훈이 마신 칵테일은 ‘ P.S. I LOVE YOU ’ 였다. 늘 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퇴근할 때만 해도 있던 세훈은 잠이 들어 눈을 뜨면 없었다. 대신에 2, 3일에 한 번씩 종류를 달리하는 식사와 메모지가 있었다. 메모지의 내용은 주로 식사 거르지 말고 잘 챙기라는, 단순한 내용이었다. 이따금씩 세훈은 없고 잘 차려진 식탁만 있는 것을 보고 있자하면 전래동화 속 우렁 각시가 생각나기도 했었다. 어쨌든 세훈이 차려놓고 간 식사를 먹고 나면 일하러 가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남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주로 아무리 자도 부족한 것만 같은 잠을 자곤 했다. 하도 잠만 자서 그런지 잠자는 것도 질려 요즘에는 책꽂이에 있는 책들 중에서 흥미를 끄는 것을 가져와 읽거나, 동생 종인의 방에 있는 음반CD를 가져와 크게 틀어놓기도 했다. 그것들은 종인의 취향이라기엔 무엇인가 어색한 잔잔한 클래식 이었는데, 틀어놓고 듣다가 지루함에 까무룩 잠이 든 적도 꽤 적지 않게 있었다. 이런 식으로 무의미한 시간들을 보내고 나면 일하러 갈 시간이 되어 있었다. 출근해서 정신없이 컵을 돌리며 일하고, 퇴근할 때쯤이면 세훈이 데리러 나왔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따지면 하루 중 세훈을 보는 시간은 꽤 짧았다. 그것이 썩 좋은 것은 아닌 것만 같아 몇 번이고 아침이 밝으면 깨우라고 일러두었음에도 세훈은 듣는 시늉도 하질 않는 것인지, 여전히 혼자의 힘으로 눈을 뜨고 나면 세훈은 집에 있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누군가 가볍게 몸을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을 때, 눈앞에 세훈이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방에 있는 작은 창문을 통해 비춰지는 햇빛으로 인해 세훈의 하얀 피부가 더 눈부시게 빛나는 것 같았다. 잘 잤어요? 다정하게 물어오는 목소리와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는 투박하지만 다정한 손길이 나른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멍하니 보고만 있으니, 일으켜 세우려는 강인한 손길이 느껴져 정신을 차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방을 나서는 뒷모습이 낯설어 뒷머리를 긁적이며 따라나섰다. 방을 나오니 여느 때처럼 작은 밥상이 있었고, 그 위에는 두 사람 분의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근데 너, 요리는 언제 배웠어?” “그게…….” “응?” “음, …종인이요. 종인이가 해주던 거,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거죠.” “아, 그래…….” 종인이가 요리를 잘 했었구나. 처음 안 것 같은 사실에 놀랍기도 했지만, 조금 기분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저 마냥 곱게만 자랐을 것 같은 세훈이 요리를 잘하는 것이 궁금해 물어보았던 것이, 괜히 물어본 것 같았다. 식욕이 없어진 것 같아 슬며시 숟가락을 내려놓으려니, 내 눈치를 살피던 세훈 역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세훈도 나도 아무런 말없이 밥상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한참의 침묵 후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세훈이었다. “형.” “…….” “나와 김종인은 사귀는 사이였죠.” “응.” “그렇지만, 김종인은 날 사랑하지 않았어요.” “…….” 도대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려니, 세훈은 별다른 반응을 기다리고서 한 말은 아니었는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형은 날 좋아하죠.” “뭐?” “ ‘ P.S. I LOVE YOU ’ 잘 마셨어요.” 세훈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것 같았다. 내 동생도, 동생의 애인도, 전부 내 생각과는 다른 사람들인 것 같아 괴리감이 느껴졌다. 나는 세훈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없는 것만 같은데, 세훈은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치부를 들킨 것 마냥 뜨끔해,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려다 본 세훈은 숟가락을 다시 들고서 이미 식은 찌개를 떠먹고 있었다.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세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참, 달력이 아직 2010년도 것이기에 바꿨어요.” “아…… 고마워.” “오늘이 며칠 인 줄은 알죠?”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보는 말갛게 웃는 낯이 마냥 순수한 또래와 다를 것 없어 보여 같이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밤에 일하러 가서 아침에 집에 돌아오고 하다 보니 날짜 감각이 많이 무뎌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동생이 죽은 지 한 달 정도 지난 것쯤은 알고 있었다. *** 일을 하러 가게에 도착하니, 사장님께서 특별히 마련한 종업원들과 사장님의 지인 몇몇을 불러 작은 파티를 준비 중이었다. 오늘만큼은 마음껏 마시고 놀자는 취지로 진행된 파티이기에 나와 찬열을 비롯한 바텐더들은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쉴 새 없이 떠들고 마시며 흥이 나면 무작위로 흘러나오는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춤을 추기도 했다. 좋은 날이니 만큼 다들 즐거워 보였다. 물론 나도 매우 즐거웠고, 내 옆에 앉은 찬열도 즐거워 보였다. 한참을 서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생각보다 과음을 하게 되어, 주의 집중력이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대략 시간을 보니 퇴근 시간을 앞두고 있었으나, 다들 분위기에 취해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먼저 일어나는 것이 눈치가 보였지만 얼마 안 있으면 세훈이 올 것 같아 화장실에 가는 체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니, 그런 나를 따라 고개를 드는 찬열과 눈이 마주쳤다. 어디 가느냐는 입모양에, 똑같이 소리 없이 화장실 이라고 답하고서 가게 밖으로 나왔다. 온갖 소음과 잡다하게 뒤섞인 술과 담배 냄새로 인해 답답했던 숨통이 트이고, 멍했던 머리가 한결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심호흡하며 차갑지만 시원한 겨울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그리고 올려다본 서울 밤하늘은 먹물을 뿌려놓은 듯 온통 까맣기만 할 뿐, 반짝이는 것은 가게의 간판들 뿐 이었다. 목 아픈 줄도 모르고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무슨 오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별을 찾아보려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지만 휘영청 밝은 달만 둥그렇게 떠 있을 뿐이었다. 별이 하나도 없는 밤하늘이라 그런지, 유난히 달빛이 외로워 보였다. “화장실 간다더니, 여기 있었네.” “어? 넌 왜 나왔어.” “그냥, 답답해서. 너도 그래서 나온 거 아냐?” “맞지.”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옆에서 들린 찬열의 낮은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하늘 위로 시선을 돌렸다. 찬열 역시 나와 같이 밤하늘을 보다가, 날 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술이 완전히 깨지 않은 건지 맑아졌던 시야가 흐릿했다가, 다시 맑아지는 것을 반복했다. 세훈이 올 때가 된 것도 같은데 보이질 않아, 다시 안으로 들어갈까 싶은 생각으로 담벼락에서 몸을 떼었을 때, 나도 모르게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던 것 같았다. 앞으로 넘어질 뻔 했던 것을 찬열이 붙잡아 주었다. “조심 좀 하지.” “어어, 아직 술이 덜 깼나. 고마워.” “부축해줄까?” “응? 아냐, 괜찮아.” 부축해주겠다며 나서는 찬열을 밀어내는 손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결국 다시 가게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한 채로 다시 담벼락에 등을 기대니, 내 앞에 선 찬열로 인해 까맣게 그림자가 드리웠다. 한참이고 비켜나질 않기에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드니, 찬열의 단단한 손이 턱을 강하게 붙잡고는 곧장 제 입술을 포개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무슨 일인지 가늠조차 못 할 때에,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뜨거운 살덩이에 술이 확 깨는 기분이 들어, 뒤늦게 고개를 비틀며 어깨를 밀어내니, 찬열은 생각보다 쉽게 밀려났다. 찬열은 고개를 숙인채로 있었고, 그 뒤로 시선을 돌리니 그곳에 세훈이 서있었다. 세훈의 날선 눈총이, 나인지 찬열인지 알 수 없는 상대에게 꽂혔다. 괜히 찔리는 마음에 아랫입술을 깨물며 불안한 시선으로 세훈을 보았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밤공기에 뒤섞여 들었다.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오게 되었는지 기억나지가 않았다. 찬열의 등 뒤에 있는 세훈을 발견한 뒤로 도망치듯 가게 안으로 들어왔고, 급하게 겉옷을 챙기고 사장님께만 겨우 인사를 하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훈은 여전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었고, 그 앞에서 나는 마치 애인에게 바람피우는 현장을 들킨 사람 마냥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세훈은 그저 묵묵히 나를 보다가 먼저 발걸음을 돌렸다. 지독한 침묵 속에서 집까지 걸어왔다. 세훈이 앞서고 나는 그 뒤에서 죄인 마냥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세훈이 밟았던 길을 따라갔다. 찬열은 이미 안중에 없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세훈은 말이 없었고, 집에 도착하고 난 뒤에 세훈은 종인의 방으로 들어가 쾅, 소리 내어 문을 닫았다. 유난히 크게 들리는 문소리에 흠칫 놀라 떨리는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을 땐, 어두운 현관에 나 홀로 서있었다. 방으로 들어와서도 약간은 멍한 상태였다. 겉옷을 벗을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방안에 멀뚱히 서있었다. 가벼운 분위기에서 쉴 새 없이 웃고 떠들던 기억은 생생했으나, 그 이후로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고서도, 넋 나간 사람마냥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한 것은, 세훈은 화가 난 것 같았다. 그 대상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 상태로 시간이 조금 지나니,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화가 나? 세훈과 내 관계를 분명하게 정의하자면 세훈은 종인이의 애인이었고 나는 종인이의 형이었다. 처음 만날 때에도 그렇게 만났으므로, 말하자면 나는 세훈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는 관계였다. 물론 내가 세훈의 상황이었다면 화가 날 법도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세훈이 나를 좋아하는 걸까? 그건 알 수가 없었다. 복잡하게 엉키는 생각 속에서 잠 못 이루다, 해가 뜨는 것을 끝으로 결국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꽤 오랜 시간 잠을 잤는지, 눈을 떴을 때는 붉은 노을빛이 작은 창문 틈으로 비춰들고 있었다. 해가 뜰 때 잠이 들고, 해가 질 무렵에 잠에서 깨어난 것이 괜히 웃겨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다가 문득 새벽까지 줄곧 나를 괴롭혔던 세훈에 대한 생각으로 인해 다시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방에 틀어박혀 나갈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가 되어서야 방 밖으로 나왔다. 불 꺼진 거실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작은 소반 위에 예전처럼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소반 위에는 해장국과 더불어 일어나면 국 데워서 먹으라는 메모지가 있었다. 전과 다를 바 없는 세훈의 태도에 울컥하는 마음이 생겨 이를 악물고서 망연히 소반 앞에 앉아 있었다. 세훈에게 붙잡혀 꼼짝 못하고 휘둘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억울하면서도 고맙기도 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미 식은 국이었지만 숟가락을 들어 한 숟가락 떠먹는데, 그 맛이 어디선가 먹어본 적 있는 것 같은 익숙한 맛이기에 결국 숟가락을 내려놓고 두 무릎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 속 언젠가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왔을 때 종인이, 나 몰래 해장국을 끓여놓고 등교했던 날 먹었던 것과 같은 맛이었다. *** 결국 세훈이 차려놓은 밥을 먹지 못하고서 거실 한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집안에 가득한 적막한 고요가 싫어 종인의 방에서 음반CD를 꺼내와 크게 틀어놓았다. 집안 가득 종인의 취향으로만 이루어진 노래들이 메워졌다. 개 중에는 굉장히 오래된 올드 팝도 몇몇 섞여 있었다. 아마, 종인이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곡들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영어가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대충 들리는 귀에 익은 단어들로 보아 사랑노래인 것 같았다. 어지러운 음악 틈으로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지만, 굳이 현관 쪽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하지 않았다. 묵묵히 앞만 쳐다보고 있으려니, 세훈 역시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내 앞을 그냥 지나쳤다. 그러다가 작은 소반에 하나도 손대지 않은 식사를 보고서 세훈은 지나치려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밥 안 먹었어요?” “…….” “형, 밥 안 먹었냐고요.” “…….” “준면이 형.” “…….” “형.” 내 앞에 가느다란 두 개의 다리가 멈춰 섰다. 부름에 응하지 않는 것이 꽤 짜증스러웠는지 목소리에 날이 서있었다. 지금 세훈에게 대답을 했다간 곧장 울음이 세어 나올 것 같아, 꿋꿋이 침묵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머리 위에서 세훈의 짙은 한숨이 들렸고, 세훈은 자세를 낮추어 나와 눈을 마주했다. 표정 없는 하얀 얼굴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애먼 곳을 보고 있으려니 세훈이 팔을 뻗어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왜 밥 안 먹어요.” “…….” “저랑 말 안 할 거예요?” “…….” “왜 그래요, 진짜. 칵테일 만들어줘서 사람 마음 흔들어 놓고, 정작 다른 새끼랑 키스하는 꼴 보여주고, 사람이 원래 그렇게 제멋대로에요?”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요.” “너야 말로 뭔데, 너 종인이 좋아서 쫓아다녔다며. 종인이는 너 좋아하지도 않는 거 알면서도 사귀었다면서, 그런데 종인이 형인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뒷말은 내 뒷목을 잡아 끌어당겨 입을 맞추는 세훈으로 인해 이어지질 못했다. 억지로 밀고 들어오는 세훈을 있는 힘껏 밀어내며 얼굴을 비틀었다. 겨우 밀려난 세훈은 곧장 다시 제 손으로 내 얼굴을 강하게 붙잡고서 입을 맞추려 들기에, 주먹을 쥐고서 어깨를 치며 밀어내었다. 세훈은 맥없이 뒤로 물러났고, 그러자 끝내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울어버리는 나로 인해 세훈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네가 만들어줬던 것들 결국은 다 종인이가 너한테 해줬던 것들이었고, 처음부터 네가 여기 온 것도 종인이 부탁이었고, 어쨌든 너는 종인이 애인이고 나는 종인이 형이잖아!” “…….” “그래. 내가, 내가 너 좋아해. 넌 종인이 애인인데 너 좋아해, 그래서 칵테일 만들어주고 그랬어. 하지만 너는? 너는 아니잖아. 그런데 너야말로 나한테 왜이래. 내가 다른 새끼랑 키스를 하던 뭘 하던 네가 무슨 상관인데!” 악에 받쳐 울분을 터뜨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가려 발걸음을 옮겼으나, 곧장 내 손목을 붙잡는 세훈의 강압적인 손 때문에 강제로 몸이 돌려졌다. 어두워서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세훈은 화가 난 것 같아 보였다. “지금까지 내 말 뭐로 들었어요?” “뭐?” “형이 칵테일 만들어줘서 사람 마음 흔들었잖아요.” “…….” “맞아요. 김종인 좋아해서 쫓아다녔었고, 나 좋아하지 않는 거 알면서 사귄 거. 근데 제가 지금도 김종인 좋아한다고 했어요?” “…….” “좋아해요, 형. 이러면 되요?”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다시 한 번 세훈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춰 왔다. 부드럽게 맞물리는 입술에 이번에는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세훈의 뒷목에 손을 둘러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살덩이가 지나치게 뜨거웠다. 내 등 뒤로, 조금 열린 방문으로 나를 밀어 넣으면서도 입맞춤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방에서 나올 때 정리하지 않았던 이부자리 위로 쓰러트리는 순간에 세훈의 입술이 잠깐 떨어지며 거친 숨을 고른 뒤에 다시금 입을 맞췄다. 세훈이 먼저 상의를 벗어던지고는 내가 입은 티셔츠를 끌어 올렸다. 반라의 상태가 되었음에도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버드키스를 하며 세훈이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떡 벌어진 어깨에 손을 올리자 세훈의 손이 가슴께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혀를 세워 길게 핥아 내리기도 하며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자극을 주는 손놀림으로 인해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세훈은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가 배꼽 주변을 배회하며 원을 그리듯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발끝이 오므라드는 기분에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터질듯 나오려는 신음을 목 안으로 삼켰다. 그리고 세훈이 바지를 벗겨주고서야 완전한 나신이 되었다. 부끄러움은 이미 잊은 듯 그저 마른침을 삼킬 뿐이었다. 세훈의 입이 망설임 없이 내 것을 담았다. 뜨거운 입안과 미끈한 감촉에 탄식과도 같은 신음을 내뱉었다. 어두운 방 안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거친 숨결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이미 나신이 되었음에도 한 겨울의 추위가 느껴질 틈 없이 몸에서 나오는 열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내 손목을 잡아 자신의 중심부를 쥐게 한 세훈을 올려보며, 방금 전 세훈이 해줬듯이 상체를 숙여 입안에 세훈의 것을 담았다. 별다른 테크닉 없이 그저 빨아들이기만 할 뿐임에도 불구하고 세훈은 잇새로 낮은 신음을 내며 숙여진 뒤통수 위로 얹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머리채를 쥐어 고개를 들게 하고서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며 입을 맞추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장으로 향했다. 다급한 손길로 무언가를 찾던 세훈은 겨울이면 피부가 잘 터서 놔뒀던 로션을 손에 들고 돌아왔다. 로션을 손에 쥐고서 망설이는 눈빛의 세훈을 보니 대략 뭘 의미하는지 알 것만 같아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세훈은 곧장 제 손 위에 로션을 짜고는 내 엉덩이를 아플 정도로 세게 잡아 벌리고 손가락을 집어넣는 것 같았다. 처음 느껴보는 생소하면서도 고통스러운 느낌에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꾹 깨물고 있으려니, 세훈은 엄지 손가락으로 입술을 살살 만져주며 입 맞춰 주었다. 그럼에도 익숙하지 않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얼얼할 정도로 아려오는 느낌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사이 세훈은 로션을 더 짜고서 제 것에 바르더니 다시 한 번 내 눈치를 살피다가 자세를 잡고서 손가락을 집어넣었던 곳으로 제 것을 천천히 밀어 넣기 시작했다. “아, 악! 세훈, 아…!” “미안, 해요… 괜찮아요. 윽….” 아릿한 고통에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으려니 세훈은 쉴 새 없이 미안하다고 하며 계속해서 입을 맞춰주었다. 쏟아내던 땀과 함께 눈물이 뒤섞였다. 삽입 된 채로 가만히 있던 세훈은 얼마 안 있어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세훈이 움직일 때마다 익숙하지 않은 고통을 동반한 쾌락이 이어졌다. 그러는 도중에 어느 한 부분에서 고통이 아닌, 온 몸을 저리게 하는 짙은 쾌락이 느껴졌다. 그것이 신호가 되어 세훈의 몸짓은 조금 더 격해졌으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는 것 같은 느낌에 그저 앓는 소리만 흘리며 너른 등을 끌어안았다. 맥없이 흔들리는 다리를 허리에 감으며 세훈의 어깨 너머에 있는 문가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곳에는 죽은 동생 종인이 서있었다. 매우 혐오스러운 무언가를 지켜보고 있는 것 마냥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얼굴의 종인이 매우 정확한 시선으로 날 보고 있었다. “흣, 아, 아아…….” ‘천박하긴.’ 그것은 분명 죽은 동생 종인의 환영이었으나 너무나도 선명했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인 것 마냥. 하지만 어떠한 죄책감도 느껴지질 않았다. 나를 보는 종인의 시선이 어떻건 간에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의 쾌락만 중요했다. 나는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짙은 오르가즘을 느끼며 문가에 서있는 종인과 계속해서 눈을 마주했다. 폭풍 같았던 밤이 그저 꿈인 줄 알고서 생각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눈을 떴을 때, 옆자리에 누워있는 다부진 상체의 세훈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것 같았다. 눈을 감고 깊게 잠든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완전히 몸을 틀어 세훈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반듯한 이마도 보고 콧날도 손으로 만져보고, 그리고 그 아래에 자리한 입술에 손을 대었다.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는 입술에 손을 대었을 때, 온 몸에 닿았던 입술의 감촉이 떠오르는 것 같아 순간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갈증과 더불어 더위가 느껴져 자리에서 일어나 손부채질을 했다. 그제야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음을 깨닫고, 일단 주변에 보이는 옷가지를 주워 입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찝찝한 느낌도 있는 것 같아, 방을 나와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병 채로 입에 대고 마신 뒤에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섰다. 욕실에 있는 거울을 통해 본 맨 몸에 울긋불긋한 자국들이, 밤에 있었던 일들이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주었다. 그렇다면, 절정의 끝자락에서 보았던 종인도 사실이었을까? 문득 뇌리를 스치는 종인의 시선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몹시 혐오스럽다는 얼굴로 빤히 쳐다보며 천박하다고 중얼거렸던 동생. 하지만 동생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기에 곧 그것은 그저 잘 못 본 환영일 뿐이라 치부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었을까 라고 생각한 스스로가 어이없어 픽, 웃으며 물을 틀었다. 씻고 나왔음에도 세훈은 아직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세훈이 깨어났을 때 간단히 먹을 요깃거리라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부엌으로 가려고 했을 때 문득, 살짝 열린 것 같은 동생의 방문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방문이 열려있었던가? 어딘지 찝찝한 기분에 뒷머릴 매만지며 동생의 방으로 들어갔다. 세훈이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트렁크 외에는 생전 동생이 쓰던 방 그대로였다. 기분 탓에 별게 다 신경 쓰인 것 같아 다시 방을 나가려는 찰나, 책장 밑에 떨어져있는 꽤 두꺼운 공책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인가 싶어 그 앞에 무릎을 구부리고 주저앉아 집어 들었다. 자세히 보니 공책이 아니라 일기장 같은 것이었다. 종인이가 일기도 썼다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동생이 죽은 뒤로 유품 정리를 한 적이 없기에 처음 보는 물건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호기심이 생겨 일기장의 앞장을 넘기려는 찰나, 등 뒤에서 무게가 실리며 뒷덜미에 익숙한 체향이 훅 끼쳤다. 간지러움에 목을 움츠리며, 활짝 웃는 낯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세훈을 향해 돌아보며 손에 들고 있던 일기장을 등 뒤로 감췄다. “깼어?” “옆자리가 비어서요. 깜짝 놀랐잖아요, 사라진 줄 알고.” “어유, 그랬어? 애기네, 애기.” “형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세훈의 목에 팔을 두르며 웃는 낯을 감추지 않은 채로 잠깐 입을 맞췄다가 뗐다. 아침부터 유혹하는 거예요? 세훈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고개를 저으니, 웃음소리가 퍼졌다. 배고프다, 밥 먹어요. 세훈이 먼저 일어서 손을 내밀었다. 코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보다가 빙긋 웃으며 그 손을 마주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폭풍같이 지나갔던 밤이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등 뒤로 감췄던 동생의 것으로 보이는 일기장은 아무렴 상관이 없었다. 그 내용이야 언제든 볼 수 있으니 현재로썬 세훈과의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침을 먹고 난 뒤에 세훈은 가야할 곳이 있다 하고선 집을 나섰다. 집을 나가는 세훈을 마중하고 난 뒤에 거실에 앉아 시계를 보니, 일을 하러 가기까지 시간이 남았기에 오늘은 또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세훈이 갑자기 나타나서 내용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동생의 일기장이 떠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나 동생의 방문을 여니 일기장은 아침에 놔뒀던 자리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곧장 일기장을 주워들고는 방문을 닫고서 문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부드러운 가죽재질의 평범한 일기장 이었다. 무난한 아이보리색에 약간의 손 떼가 탄 것을 보아, 종인이 꽤나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런 취미도 있었나 싶어 비싯비싯 웃음이 나왔다. 남의 사생활을 엿보는 것을 썩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내용이 궁금했다. 어쩌면 나도 잘 모르는 동생에 대해 알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일단은 무작위로 일기장을 펼쳤다. 오세훈을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해왔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오세훈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여타 다른 말 하나 없이 일기장에 떡하니 적혀있는 문구가 낯설었다. 오세훈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세훈은 종인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것은 내가 세훈에게서 들었던 것이 조작된 것이 아닌 이상 사실이었다. 또 다른 말이 적혀있지는 않나 싶어 같은 페이지를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흰 종이 위에는 저 문구 외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세훈은 종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종인이의 일기에는 세훈이 종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적혀있었다. 그것은 결론적으로 보았을 때 서로가 같은 마음이 아니었다는 것은 같았지만 분명 다른 말이었다. 그렇다면, 세훈이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일까? 만약 세훈의 말이 거짓이라면 꽤나 큰 상처가 될 것 같았다. 어쩌면 배신감이 들어 치를 떨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훈이 해주었던 말이 사실인지, 종인이 일기에 쓴 것이 사실인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동생에 대해 아는 것이 적은 나 자신이 과연 종인의 형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얼마 안 되지만 내가 지금껏 알고 있던 ‘김종인’도 내 동생이고, 세훈의 입에서 나오는 ‘김종인’도 내 동생이며, 일기를 쓴 ‘김종인’도 내 동생이다. 하지만 나는 이 세 사람이 동일인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도대체 진짜는 누구인 걸까. 동생은 이 일기를 언제 썼으며, 무슨 의미로 이것을 일기에 썼을까. 답을 알 수 없었다. 종인아, 넌 누구니? 과연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종인이가 진짜 종인이가 맞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 속에서도 끝내는 동생의 죽음까지 의심하고 마는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 조금은 멍한 상태로 출근을 했다. 같이 일을 하는 종업원들이 건네는 인사에도 건성으로 답해주며 넋 나간 사람마냥 앞치마를 손에 쥐고 탈의실에 앉아있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죽은 내 동생 ‘김종인’에 대한 생각으로 인해 그 외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사슬을 끊어낼 수 없어 결국 머리를 쥐어 싸매며 고개를 숙였다. “어디 아파?” “어? 아…….” 그 순간, 머리 위에서 들리는 낮은 찬열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 잊고 있었던 찬열과의 입맞춤이 재생되었다. 멍하니 찬열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찬열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너무 뚫어져라 쳐다본 건가 싶으면서도 찬열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인식되지 않아 한참을 대답을 망설였다. 찬열은 딱히 대답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는지 입고 왔던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앞치마를 걸쳤다. 일하러 안 가? 또 다시 넋을 놓아버린 나를 보며, 찬열이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말을 걸었다. 황망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찬열의 뒤를 따라 나서면서도 정신은 다른 곳에 몰려있었다. 잦은 실수가 반복되었다. 때때로 눈앞이 흐려지는 것 같기도 해서 몇 번이고 컵을 손에서 놓쳤다. 결국 보다 못한 찬열이 안으로 들어가 쉬라고 했지만,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생각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한사코 거절했다. 스스로도 한계가 느껴졌지만 꿋꿋이 손님에게 줄 얼음을 조각하던 도중 결국 손을 다치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따끔한 고통에 붉은 피가 흐르는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질적인 느낌에 몸서리를 치며 찬열이 쥐어주는 수건으로 지혈을 하면서 탈의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세훈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탈의실로 들어왔다. 매번 데리러 오는 세훈으로 인해 낯이 익은 종업원이 들여보낸 것 같았다. 다쳤다면서요? 종업원들에게서 들었는지 세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곁에 앉았다. 세훈을 보니 울컥하는 마음에 미간을 좁히고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세훈아 난 정말… 못난 형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종인이 죽은 거 맞지?” “……네.” “그래, 종인이는 죽었어. 죽은 지 한 달 정도 지났어. 응, 맞아. 종인이는 죽었어.” “…….” 넋두리처럼 말을 늘어놓는 나를 보던 세훈의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었으나, 말없이 팔을 들어 어깨를 감싸 다독이는 손길이 한없이 다정했다. 괜찮아요. 머리 위에 얹어지는 목소리마저 다정하게만 들렸다. 일기장에 적힌 내용을 차근차근 다 읽어봐야만 해답이 풀릴 것 같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제는 항상 세훈과 아침을 맞이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세훈은 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나는 그런 세훈을 마중해주었다. 세훈이 집을 나서고 집에 완전히 혼자가 되면 그때 내 방 서랍 한 구석에 숨겨놓은 동생의 일기장을 꺼내온다. 일기장을 보다보면 문득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해서 부러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일기장을 펼친다. 동생의 일기장은 2010년도의 어느 날 이후로 쓰이질 않았는데, 아무래도 그간 동생이 바빠서 못 쓴 것도 있고, 지금은 죽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하고 짐작해보았다.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대충 넘겨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읽어보자는 생각으로 조금은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첫 장을 넘겼다. 나는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따금씩 내 형이 잠든 모습을 볼 때면 기분이 이상해지곤 했다. 그리고 그 날 꿈에 형이 나왔고, 나는 첫 몽정을 했다. 죄책감이 들었다. 이제 나는 형을 어떻게 봐야할까. 탁. 일기장을 덮었다. 나도 모르게 떨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 말고 또 다른 누군가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작은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고 식은땀이 절로 났다. 일기장의 첫 장 내용이 처음 일기장을 발견하고 중간 즈음을 펼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니까 내 동생이 나를, 나를……. 머릿속이 꼬여서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조심스럽게 일기장을 다시 펼쳐 첫 장의 내용을 또 읽어 보았다. 처음에는 화가 났었지만 어쩐 일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는 사라졌었다. 어쩌면 동생은 알게 모르게 혼자서 모든 성장통을 다 겪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일기장에는 동생이 견뎌 내야했던 통증들이 담겨있을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오히려 전보다 훨씬 차분해지는 것 같은 기분에 바로 다음 장으로 넘겼다. 고등학생이 된 이후 형과는 조금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교하면 비어있는 집이 전혀 익숙해지질 않았다. 대학생들은 원래 그렇게 바쁜 건가.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처음 눈이 마주쳤던 오세훈. 그 눈빛이 잊어지질 않았다. *** 아직 중학생 티를 완전히 다 벗지 못한 풋내기 남학생들이 모인 공간에서 담임선생님은 각자 출신 중학교를 말하며 자유롭게 자기소개 시간을 가지자고 했다. 유치하게 뭐하는 거냐며 반발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막상 자기소개가 시작되니 앞줄부터 차례로 일어나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수줍음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종인은 창틀에 손가락을 두드리며 무료한 표정으로 그 모습들을 눈에 담고 있었다. 일부러 졸업한 중학교에서 먼 곳으로 지원했기에 같은 중학교 출신은 없이 전부 다 생소한 사람들뿐이었다. 딱딱딱딱. 손가락을 두드리는 횟수가 점차 늘어날 때, 종인의 차례가 되었다. 거의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기에 본인의 차례인줄도 몰랐던 종인은 어영부영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종인이라고 합니다. H중학교 나왔고, 현재 대학생인 형이랑 둘이서 살고 있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짧게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으려던 찰나, 중학교에서부터 온 생활기록부를 넘겨보던 선생님이 종인을 다시 불렀다. -여기, 동아리 활동 기록 보니까 댄스 동아리였던데. 나중에 종인이 춤 볼 수 있는 거야? -아…… 기회가 되면요. 종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을 하자 순식간에 왁자지껄 해졌다. 대부분은 지금 보여 달라는 말로 입이 맞춰져 있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종인은 뒷머릴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나중에요. 종인이 자리에 앉자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가 한데 나왔지만, 담임선생님은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보자며 자기소개를 이어서 하라고 지시했다. 저도 모르게 낯부끄러움을 느낀 종인이 손부채질을 하다가 문득 반대편 가장 끝자리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제 형만큼이나 하얀 피부를 가진 남학생이었다. 날카로운 눈초리로 쳐다보기에 어리둥절해서 같이 보고 있으려니 먼저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이 어딘지 께름칙해 종인은 기분이 뒤숭숭해졌다. 그리고 종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남학생의 차례가 되었다. 조금은 어수선하던 반 분위기가 그 남학생의 차례가 되자 눈에 띄게 조용해진 것 같았다. 드륵. 남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학생이 일어섬과 동시에 종인의 시선이 같이 따라 올라갔다. 딱 딱 딱 딱. 창틀에 두드리던 손가락의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H중학교 나온 오세훈이라고 합니다. 딱. 종인이 깜짝 놀라 남학생을 보았다. 남학생의 시선 역시 종인을 향해 있었다. 어라? 분명히 제가 알기론 이 학교에 지원해서 붙은 사람은 저 혼자뿐이라고 들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동창의 등장에 종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남학생이 자리에 앉고, 자기소개는 다시 이어졌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종인은 사각형의 공간 안에 저와 세훈뿐인 것 마냥 계속해서 세훈과 시선을 마주했다. ⌜처음에는 형을 생각하는 횟수가 더 많았지만 요새는 세훈을 더 많이 떠올리게 된다. 그 이후로 세훈과 나는 동창이라는 이유로 친해졌던 것 같았다. 물론 이건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우린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건 아니었지만 항상 같이 다녔던 것만큼은 확실했다.⌟ 준면은 휴일임에도 분주히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종인은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바쁘게 부엌과 방을 오가는 형에게서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아무리 대학생이라지만 요새 준면이 늦게 들어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도 엄청 지독한 담배냄새와 술 냄새 같은 잡다한 냄새들을 잔뜩 묻히면서 말이다. 요즘 들어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형이 걱정스러워 준면은 텔레비전을 끄고 준면의 방문 앞으로 갔다. 종인이 있는 줄도 모르고 가방을 챙기는 준면의 손길이 꽤 다급했다. 종인은 문지방에 서서 팔짱을 끼고 준면을 지켜보았다. -형. -어, 어? 내가 문지방에 서있지 말랬지. -그건 또 언제 보고. 참, 요새 바빠? -아 이런. 미안해, 형이 요즘 잘 못 챙겨줬지. 밥 해놨으니까 꼭 챙겨먹고. 아니면 먹고 싶은 거 있어? 돈 놔두고 갈게. -……. 다급하게 제 할 말만 해버리는 준면으로 인해 종인은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조용해진 종인으로 인해 준면은 그제야 문간에 서있는 종인을 보았다. 저보다 훨씬 키가 크지만 여전히 어린 테가 남은 소년의 불퉁한 표정에 준면은 웃고 말았다. 마저 가방을 챙기고 등에 멘 준면은 종인의 앞으로 가서 팔을 길게 뻗어 종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미안해. 형이 요즘 아르바이트해서. 너 대학 보내려면 부지런히 돈 모아야지. -그깟 대학, 가면 뭐가 좋다고. -씁. 정 집에 혼자 있기 심심하면 친구라도 불러서 놀아. 알았지? -것보다 어디서 일하는데? 매번 늦게 오는 것 같아서, 데리러 갈게. -괜찮으니까 기다리지도 말고 일찍 자. -걱정되니까 그렇지. 형은 모르겠지만 사실 나 오토바이 자격증도 있어, 오토바이도 있고……. -알아도 모른 척 해줬더니… 어휴.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해. 형 다니는 대학교 근처에. -그럼 정문 앞에 서있어, 몇 시에 끝나? 시간 맞춰서 갈게. -오늘은 일찍 가니까 밤 열한시에. 대신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응, 알았어. 조심히 가고. 종인은 현관 앞까지 준면을 배웅했다. 준면은 굳이 뒤를 돌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에 종인 역시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집에 혼자 남은 종인은 준면이 나갈 준비를 하면서 미처 정리하지 못한 청소를 시작했다. 옷가지들을 한데 모아 세탁기에 집어넣고 빨래도 해놓았다. 정 혼자 있기 심심하면 친구라도 불러서 놀아. 모든 집안일을 다 끝내 놓고 소파에 앉아 있으려니 문득 스치는 준면의 말에 종인은 곧장 세훈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세훈의 집 근처에도 가본 적도 없었고, 세훈을 제 집 근처에도 부른 적 없었다. 이참에 집에 초대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휴대폰을 들었을 땐 세훈의 연락처를 누르질 못했다. 한참이고 망설이던 종인은 눈 딱 감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 긴 통화음이 울리지 않고 세훈은 전화를 받았던 것 같았다. -여보세요. -어, 나 종인이. 너 지금 뭐하냐? -잠깐 밖에. 왜? -아… 그냥, 집에 혼자 있기 심심해서. -미안. 선약이 있어서. -여자 친구라도 있어서 그런가 보다? -……. 종인이 웃는 낯으로 물었던 질문에 세훈은 답을 망설이는 것 같았다. 종인이 느끼기엔 그랬다. 장난 식으로 물었던 것과는 달리 답이 없는 세훈으로 인해 외려 종인이 당황하고 말았다. 한참을 답이 없기에 종인은 전화가 끊긴 건가 싶어 귀에서 떼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숫자가 바뀌는 것으로 보아 전화가 끊긴 것은 아니었다. 전화가 끊기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나서 다시 귀에 대니 그제야 세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인은 있어. 그 순간 종인은 직감적으로 세훈이 말한 애인이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아마 종인은 꽤 놀랐던 것 같았다. 어색한 웃음으로 데이트 잘 하라고 답한 뒤 급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심장이 세차게 뛰며 호흡이 가빠지고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애인이 있다고? 그것도 어쩌면 남자일 확률이 높은, 애인.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차라리 여자 친구 있냐는 물음에 바로 그렇다는 대답을 했더라면, 세훈 역시 동성애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텐데. 종인은 세훈의 대답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그때 종인은 또 하나 깨달은 것이 있었다. 어쩌면 내가 세훈이를. 종인은 그 순간 자신이 느꼈던 모든 감정들을 일기장에 기록했다. 차마 제 형에게는 말할 수 없었던 자신의 성정체성과 그동안 미처 깨닫지 못했다가 갑작스럽게 알게 되어버린 짝사랑을. 요새 종인은 형 준면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여느 때처럼 등교준비를 하는 종인에게 오늘은 괜찮으니 일하는 곳으로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니, 그 이후로 쭉 데리러 오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 종인은 못내 섭섭하면서도 형의 말이기에 하는 수 없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요새 형이 밖에서 전화 통화를 자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종인이 집에 있을 때만 말이다. 형의 변화가 종인은 꽤 많이 신경 쓰였다. 혹시, 형이 연애라도 하나? 문득 제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으로 인해 종인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형이 연애라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훈이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다르다는 것이 어떤 식으로 다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종인과 세훈의 관계는 여전했다. 가까운 듯 먼 사이. 다만 종인이 조금 더 세훈을 의식하고 신경 쓸 뿐이었다. 그리고 세훈은 종인이 자신을 의식하고 신경 쓴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으나, 종인이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는 그것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세훈은 종인의 태도가 조금 불편하긴 했다. 머지않아 종인은 결국 신경 쓰지 않는 척, 세훈에게 애인에 대해 물어보았다. -대학생인데, 나보다 작고 하얗고 예뻐. 세훈의 대답을 듣는 순간, 종인은 어쩐 일인지 제 형의 모습이 떠올랐다. 종인은 형의 성화에 못 이겨 반강제적으로 독서실에 다니게 되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제 마음대로 불참한다고 해버린 종인으로 인해 화가 난 준면이 독서실이라도 가라며 한 달 치를 예약해두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종인은 야간 자율학습을 하지 않아도 매일 밤 10시까지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와야 했다. 그 날도 독서실에서 비문학 문제집을 풀다가 졸기도 하고, 영어 독해 문제집의 지문을 읽다가 게임을 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낸 뒤에 정확히 밤 10시가 되자마자 집으로 향했다. 종인이 다니는 독서실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어서 빨리 집에서 쉬고 싶은 마음에 종인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 형은 이미 일하러 간 것인지 집안에 불이 켜져 있지 않았었다. 벌써 갔나. 제 휴대폰의 시계를 확인하며 현관의 불을 켠 종인은, 그 자리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현관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진 두 켤레의 신발과 뱀이 허물을 벗어놓은 것 마냥 준면의 방으로 이어지는 옷가지들. 종인의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어떤 상황인지 예상이 갈 것 같으면서도, 아니길 바라는 심정으로 종인은 허리를 숙여 형의 옷가지들을 하나씩 주우며 준면의 방 앞으로 갔다. 준면의 옷을 쥔 종인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부들부들 떨렸다. 심호흡을 하며 종인은 문틈으로 준면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문틈으로 보이는 준면은 완벽한 나신이었다. 남자의 허리에 감은 다리에 눈에 띄게 희고 가늘었다. 남자의 목에 매달려 쾌락에 젖은 표정이 천박하게만 느껴졌다. 줄곧 알고 있던 형과는 너무도 다른 것 같아 종인은 괴리감이 들었다. -하으, 세훈… 아……! 준면의 입에서 불린 익숙한 이름으로 인해 종인은 손에 들고 있던 옷가지를 모조리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 나는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질투를 느낀 것은 맞지만, 그것이 형을 향한 분노와 질투인지 아니면 세훈을 향한 분노와 질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세훈이 말한 애인이 내 형이라는 것. 아. 어쩐 일인지 형을 죽이고 싶었다. 내 형이, 사라져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의 일기장을 든 내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일기장에는 그 당시 동생의 분노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꾹꾹 힘을 주어 쓴 것 마냥 굵은 글씨와, 뒷장에 남은 볼펜 자국이 그 예시였다. 그렇지만 동생의 일기장엔 한 가지 모순이 있었다. 그것은 나와 세훈이 원래부터 사귀는 사이였다는 것. 일기장은 동생이 고등학교에 막 입학하고서 쓰인 것이니, 동생의 일기장에 따른다면 나와 세훈이 적어도 3년은 알고 지냈다는 뜻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세훈을. “이게 뭐에요?” “그, 그거…!” 이미 일기장은 세훈의 손으로 옮겨졌다. 일기장을 읽는 세훈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세훈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훈의 팔을 잡았다. 세훈은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알 수 없어 그저 세훈을 올려 볼 뿐이었다. 세훈이 내 어깨를 강하게 그러쥐었다. 아픔이 느껴져 짧게 신음을 흘리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세훈은 고개를 숙인채로 부르르 떨고 있었다. 미약하게 흐느낌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내가 사랑한 건 처음부터 형이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어요?” “…….” “왜… 우리가 사랑한 3년을 기억 못해요…….” “…….” “도대체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건 뭔데요, 비밀뿐인 당신만의 세상을 만들어낸 이유가 뭐에요?” 비밀뿐인 나만의 세상? 세훈이 울면서 하는 말이 하나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도 분명 세훈을 사랑하는 것이 맞지만, 내가 세훈을 알게 되고 사랑한 것은 3년씩이나 되질 않았다. 나만의 세상을 내가 만들었다는 건 또 무슨 말인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손등 위로 차가운 것이 떨어지는 것 같아, 확인하니 그것은 물이었다. 의아함에 손을 들어 내 눈가를 더듬으니, 어느새 나 또한 울고 있었다.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내 손에 묻은 물기를 보았다. 왜, 눈물이 나오는 거지? 그리고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리는 세훈을 보았다. 다시 시선을 돌리니, 주변의 풍경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머리가 아파왔다. 맞은편을 보니 그곳에는 죽은 내 동생 종인이 서있었다. 동생은 웃고 있었다. 아니, 울고 있었다. 종인은 울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다. 분명 집 안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도로의 한 가운데에 서있었다. 종인은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내 쪽으로 질주했다. 내게 점점 속도를 높여 다가오는 오토바이. 위험을 감지하고 세훈에게 피하라고 말하려 고개를 돌렸을 때,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세훈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주변을 둘러보며 세훈을 찾았다. 하지만 원래부터 세훈은 없었던 것 마냥, 존재하지 않았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오토바이의 전조등이 따갑게 눈을 부시게 해 눈을 감아 버렸다. 강한 충격이 느껴지고 힘겹게 다시 눈을 떴을 땐, 여전히 우는 얼굴의 종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쿵. 내 옆으로, 종인의 헬멧이 떨어졌다. 나는 도로 위에 가만히 누워, 올곧이 종인을 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내 가슴께로 흰색의 봉투가 떨어졌다. 그 봉투의 끝자락이 붉은 색의 피로 물들었다. 그것을 본 순간, 동생이 죽었을 때 동생이 가지고 있던 돈 봉투가 떠올랐다. ……세훈아. 누군가 내 머리를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마냥 아팠다. 고통의 신음이 나오는 잇새로 겨우 세훈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동생의 표정도 고통으로 물들었다. ‘본 법정은 피고인에게 징역 15년 형을 선고합니다.’ 탕 탕 탕 아직도 그 당시 판사가 두드렸던 판사 봉의 마찰음이 귓가에 아득하게 남아 있었다. 눈을 감으면 빗물에 섞인 핏자국과 고통에 일그러져 있으면서도 제 품에 있는 돈 봉투를 건네던 형의 모습이 선연했다. 겨우 잠이 들었다가도, 판사 봉의 마찰음을 들으며 잠에서 깨어나는 하루의 반복이었다. 3년 전 그날 이후 내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고통과도 같았다. 나는, 법 앞에서가 아닌 형의 앞에서 죄인이었다. *** “석방이다.” 종인은 제 앞에 서있는 교도관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제가 이곳에 얼마나 있었는지 가늠해보았다. 판결을 받고 3년이 흘렀으니, 이곳에 겨우 3년 있었다는 뜻이었다. 선고받은 형을 다 살기 까지는 12년이 남아있었고. 그런데 석방이라니? 종인의 얼굴에 띄워진 의문을 알아차린 교도관이 종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는 낯으로 말했다. “네가 워낙에 모범수라, 가석방이다. 원래 15년 유기형의 경우에 모범수들은 3년 지나면 가석방이야. 그래서 내가 너 처음에 여기 왔을 때 조용히 3년만 버티라고 한 거, 기억 안 나냐?” “아…….” “이미 빨간 줄이 그어진 건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나가서 새 삶 시작해야지. 너 인마 아직 젊지 않냐, 하나도 안 늦었다.” “…….” “나가서는, 실수라도 범죄 저지르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보고 싶으면 찾아 와도 되는데, 대신 죄수복 말고 사복 입은 모습으로 보자, 알았냐?” 교도관은 웃는 낯으로 종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방을 나왔다. 가석방. 이 세 단어가 아직은 어색했다. 조금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짐을 챙기고, 교도관이 건넨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40대 중반의 교도관은 종인이 처음 입소했을 때부터 유난히 종인에게 친절했던 사람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태생부터가 몸이 허약해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냈다고 했었다. 마침 그 죽은 아들이 자랐다면 종인과 비슷한 또래라 유난히 종인에게 잘 대해 주었었다고, 교도관은 출소 준비를 마친 종인에게 덧붙였었다. 종인은 육중한 소년 교도소의 철문 앞에서 교도관에게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다 갖추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교도관은 조금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종인을 안아주고는 등을 토닥였다. 교도관이 열어주는 철문을 막연히 바라보던 종인은 조심스럽게 교도소 밖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아…….” 예상대로 교도소 밖에서 저를 반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종인은 발걸음을 옮겼다. 3년 만에 다시 찾는 집이었다.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을 때,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쉽사리 발을 들일 수가 없었다. 집 밖의 시간은 전부 현재의 시간인데, 집 안의 시간은 3년 전 그날로 멈춰있었다. 아직까지도 벽 한 쪽에 걸려있는 2010년도 달력을 본 순간, 혹시 자신이 여태 날짜를 잘 못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위화감이 없었다. 아. 오늘 날짜를 확인한 종인은, 현관에서 그대로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가석방된 날인 오늘이 형이 죽은 지 꼬박 3년째 되는 날이었다. 종인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보려 먼지 쌓인 집안부터 쓸고 닦았다. 부러 굳게 닫힌 형의 방문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교도소 생활에 하도 익숙해져 있다 보니 청소에는 도가 텄다. 집안 곳곳을 쓸고 닦고 하다 보니 어느덧 저녁놀이 지는 시간이었다.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저녁놀로 붉게 물든 창을 바라보았다. 교도소에 수감될 당시만 해도 집안에 고요할 틈 없이 울리던 전화 벨소리가, 막상 석방되고 난 뒤에는 조용한 것이 어색했다. 어쩌면 아직 친척들은 제가 석방된 것을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먼저 나서서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형이 죽은 것과 제가 수감된 것만으로도 남 말하기 좋아하는 고모들의 입방아에 질리도록 올랐으니, 더 오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다만 종인이 허전한 것은, 충동적으로 형을 죽여야 했던 원인 제공자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것이었다. 잔인한 놈. 종인이 기억하는 세훈의 마지막 모습은, 재판이 끝나고 재판 참관자들 사이에 섞여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그 모습이 다였다. 그 이후로 세훈은 단 한 번도 종인을 면회하러 온 적도 없었고, 편지나 영치금 같은 것도 보내준 적도 없었다. 생각보다 세훈은 종인에게 한없이 냉담했다. 아, 어쩌면 세훈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대가가 아니었나 싶기도 해서, 종인은 또 다시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교도소 밖을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운 것은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교도소가 아닌 밖에서의 생활이 더 고통스러워 지옥 같게만 느껴졌다. 새 삶을 시작하라는 교도관의 말이 무색하게, 세상의 편견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고등학교 중퇴에, 발급 받은 주민등록증 뒷면에 그어진 빨간 색의 사선으로 인해 종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종인이 직면한 현실은 차갑기만 했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속죄 역시 종인을 괴롭히는 것들 중 하나였다. 꿈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되는 그 날의 사고. 제 오토바이에 부딪히는 마찰음과 바닥에 쓰러진 형의 모습, 하얀 피부를 뚫고 나온 붉은 자국들 그리고 제게 건네지던 붉은 핏자국이 남은 흰 색의 돈 봉투. 종인은 잠을 자는 것조차 두려워 뜬 눈으로 지새곤 했었다. 오랜만에 날이 화창했다. 빨래를 널고 나른한 기분에 평상에 드러누워 잠시 눈을 감았다. 웬일인지 눈을 감으면 떠오르던 모습이 떠오르질 않아 마음이 편안했다. 따스한 볕 아래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막 잠이 들려고 할 때쯤, 계단을 오르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종인의 귓전에 울렸다. 눈을 덮은 팔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떠오르는 인물이 있어 부러 그 자세 그대로를 유지했다.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바뀐 것 같았다. 3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익숙한 체향이 코끝에 닿았다. 종인은 지금 당장이라도 눈을 떠서 집을 찾아온 사람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눈을 떴을 때 제 앞에 선 그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처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을까봐 두려웠다. “김종인.” “…….” “안자고 있는 거 아니까 일어나.” 파르르, 속눈썹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거칠어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을 떴을 때, 종인은 다시 눈을 감고 싶어졌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세훈의 시선이 차갑고 날카로웠다. 칼로 온 몸을 베는 것 같은 날카로움에 절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음에도 세훈의 시선은 변함이 없었다. 아,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종인은 처음으로 가석방 된 것이 후회스러웠다. 오래 전 형과 함께 보았던 영화중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 오랜 시간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노인이 있었다. 그 노인 역시 모범수로 인정받아 그토록 원하던 석방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석방 이후에 맞이한 세상은 너무나도 많이 변해있었다. 그리고 세상의 벽은 차갑기만 했다. 자신을 향한 끝없는 편견과 교도소에서 사회로 돌아갔을 때 도움이 될 거라며 배웠던 기술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결국 노인은 자신이 사회에서 불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삶을 비관하며 자살하고 마는 내용이었다. 종인은 왜 갑자기 그 영화의 내용이 떠올랐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한 가지 알 수 있었던 것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영화를 볼 당시엔 이해가 되지 않았던 노인의 선택이 이제는 이해가 된다는 것. 종인은 현재 한 손에는 수면제를, 또 다른 한 손에는 날이 선 면도칼을 들고 있었다. 처음이 어려웠지 그 다음부터는 수월했다. 따끔한 고통이 온 몸을 관통했지만, 그 뿐이었다. 두 번째로 그었을 땐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저 조금씩 몸에서 무엇인가 빠져나가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피가 묻은 칼을 내려놓고 수면제를 다량 녹인 물 컵을 손에 쥐었다. 벌써부터 힘에 부치는지 물 컵을 쥔 손이 달달 떨렸다. 반쯤은 흘리고 반쯤은 꾸역꾸역 목을 넘겼다. 쨍그랑! 힘이 빠져 손에서 미끄러진 유리컵이 파열음을 내며 깨졌다. 죽는 것도 힘들구나. 종인은 새삼 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온 몸으로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또 보고 싶은 얼굴이 있어, 문득 울고 싶어졌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호흡은 점차 가빠지고 시야도 흐려지는데, 떨어질 생각도 없이 끈질기게 붙어있는 숨통이 원망스러웠다. 자꾸 머릿속에 떠오르는 세훈의 모습에 종인은 도리질 치며 애써 생각들을 떨쳐 내보았다. “김종인! 너 이게…!” 이젠 하다하다 세훈의 목소리까지 들리는 구나 싶은 생각에 종인은 괴로워졌다. 힘이 없는 한 쪽 팔을 들어 눈앞에 보이는 환영을 없애려 휘휘 저어보았는데, 여전히 세훈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제야 종인은 눈앞에 보이는 세훈이 환영이 아니란 것을 인식할 수가 있었다. 세훈은 떨리는 손으로 근처에 있는 이불을 끌어와 종인의 상처 부위에 대고 꾹 압박해 지혈을 했다. “누구 마음대로 죽으라고 했어, 김종인. 너 못 죽어. 평생 살아서, 평생 고통 속에 살란 말이야!” 귓가에 날카롭게 꽂히는 목소리에 종인은 힘겹게 눈을 떴다. 눈물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잔인해, 너… 정말, 잔인하다…… 세훈아. “김종인! 이 잔인한 새끼야, 꼭 살아. 평생 속죄하면서 살라고, 씨발. 너 이대로 못 죽어!” 잔인한 건 너야, 세훈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말이 허공에 흩어졌다. 눈을 감기 전, 일그러진 세훈의 모습 뒤로 제 형의 모습이 보였던 것 같기도 했다. 한 없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다정한 형 준면의 모습이 종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가족의 비밀, 마지막 - 그대를 사랑한 세계 - A 꽤나 큰 충격이었던 듯 준면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악몽이라도 꾸는 것인지 미간을 좁히고, 잇새로 고통의 신음을 흘리는 모습이 안쓰럽게만 보였다. 세훈은 준면의 머리맡에 서성이며 준면이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준면은 힘겹게 눈을 떴다. 준면이 눈을 뜬 것을 확인한 세훈이 준면의 손을 붙들고서 안도의 숨을 뱉었다. 준면은 제 손을 잡고 있는 세훈을 보다가 주변 정황을 살폈다. 불안한 시선이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형편없이 부들부들 떨리는 준면의 손을 꾹 잡아준 세훈은, 준면의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세훈의 품에 안긴 준면은 이내 불안감이 조금은 가셨는지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세훈의 품에서 벗어난 준면은 세훈을 올려보며 조심스럽게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말을 꺼냈다. 준면의 입에서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나… 꿈 꾼 걸까?”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 “어떤 게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형이 죽었다는 거 아니면 김종인이 죽었다는 거?” “모, 모르겠어.” “뭐가 꿈이고 뭐가 사실인지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 “다만 중요한건, 어느 세계에서든 오세훈은 김준면만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건 기억해줘요, 알았죠?” 세훈이 울먹이며 말을 마쳤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준면을 제 품에 끌어안으며 새어 나오려는 울음을 삼켰다. 준면은 세훈의 품에서 안정이 된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B ‘본 법정은 피고인에게 징역 15년 형을 선고합니다.’ 재판장에서 담담히 제 죄를 인정하고 그 죗값을 받는 모습이 오히려 세훈의 눈에는 더 뻔뻔스럽게만 보였다. 저럴 거면 처음부터 죽이지 말지, 도대체 왜? 세훈은 종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경찰관에게 양 팔을 붙잡혀 이동하면서 저를 바라보는 종인의 시선이 혐오스러울 뿐이었다. 종인이 힘겹게 입술 끝을 들어 올려 미소 짓는 모습이 그저 소름끼치도록 잔인하게만 보였다. 세훈에게 준면의 죽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정확히 3년이 지나고, 세훈은 종인이 출소했다는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참 오랜만에 또 다시 3년 전 느꼈던 분노를 다시 한 번 느껴야 했다. 15년 형을 선고 받은 사람이 모범수라는 이유로 석방 되었다고? 제 형을 죽인 잔인한 새끼가? 어이가 없어서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세훈이 더욱 화나는 것은, 종인이 출소한 날짜가 준면이 죽은 지 딱 3년 째 되는 날이었다는 것이었다. 세훈은 도저히 종인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몇 달 뒤, 종인 역시 제 형의 곁으로 갔다. 세훈은 싸늘하게 변한 종인을 내려다보며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릴 뿐이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제게 등 돌린 하늘이 원망스러워 세훈 역시 죽고 싶었다. 문득 종인의 손에서 빠져나가지 않은 면도칼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집어든 세훈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종인이 그랬던 것처럼 제 손목을 향해 가져다 대었지만, 차마 그을 수는 없었다. 사실 세훈은 죽지도 못해 살아가는 제 자신이 더 원망스러웠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지겠지, 조금 더 지나면 괜찮아 지겠지. 그렇게 3년의 시간을 버티고 견뎌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고통스러운 현실은 또 다시 세훈의 숨통을 옥죄여 왔다. 숨 막힐 듯 하는 고통 속에서 다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괴로웠다. 세훈은 그렇게 두 번의 장례식을 치렀다. 나른한 주말 오후, 세훈은 주중에는 바빠서 미뤄두었던 집안일을 모두 끝내고 여유롭게 자리에 앉아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며 취미 생활을 즐겼다. 요즘에 막 읽기 시작한 책이 있어, 얼마 안 남은 마무리를 보기 위해, 준면이 죽기 전 즐겨 듣던 올드팝을 크게 틀어 놓고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쳐 들었다. 그렇다고 세훈 역시 오래된 노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저 준면이 좋아했기에 찾아 듣는 것이었다. 개중에는 준면이 세훈에게 선물하는 노래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책을 넘겨보다가 문득 또 다시 떠오른 준면의 생각에 눈을 감고 가만히 숨을 골랐다. 준면을 떠올릴 때면 항상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소년이 되어 심장이 두근거렸기 때문이었다. 심장의 두근거림과 함께 귀에 익지 않았던 노랫말이 유난히 쏙 들어 박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것은 준면이 좋아하던 노래였다. 준면은 이 노래를 세훈에게 알려주며, 절대 오지 말아야 하지만 혹시라도 올 마지막 이별의 순간이 된다면 이 노래를 들려주겠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정말 어쩔 수 없었던, 아무도 거스를 수 없었던 이별의 순간에 세훈은 이 노래를 기억해내 밤새 들었었다. 그리고 받아들일 수 없던 현실을 부정하며 눈물을 흘렸었다. Maybe I didn't treat you Quite as good as I should have Maybe I didn't love you Quite as often as I could have Little things I should have said and done I just never took the time You were always on my mind You were always on my mind ……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당신한테 잘 해주지 못 했는지도 몰라요. 어쩌면 내가 최선을 다해 늘, 당신을 사랑해주지 못 했는지도 몰라요. 작은 부분까지 말하고 행동했어야 했는데, 신경 쓸 시간을 가지지 못했어요. 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있었어요. 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있었어요. You were always on my mind. 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있었어요, 내 사랑. 귓가에 잔잔히 여운을 남기는 노랫말을 들으며, 세훈은 까무룩 낮잠에 빠졌다. 참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한 마음이었다. 가족의 비밀, Epilogue ‘인간들이란 참, 재미있는 동물이야.’ ‘첸! 너 또 인간세계에 다녀온 거야?’ ‘루, 너는 수정구슬로 볼 수 있는 세계지만 난 그러질 못 해. 그래서 다녀온 거라고.’ ‘과연 가만히 보고만 왔는지 몰라.’ 루한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젓자, 첸은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러다가 입 꼬리 끝만 올려 웃으며 루한의 옆자리로 다가가 앉았다. 루한은 줄곧 들여다보고 있던 구슬을 정리하고 바로 옆으로 온 첸을 보았다. ‘들어봐, 너도 굉장히 재미있어할 걸?’ 자신만만한 첸의 말에, 루한은 어디 한 번 말해 보라는 표정으로 첸을 보았다. ‘저번에 이곳에 왔었던, 준면이던가? 그래, 걔의 동생을 보고 왔어. 참 그 애 인생 흥미롭더라. 동생 이름은 종인인데 아니 글쎄 형의 애인을 사랑한 거야, 여자도 아니고 남자 애인을. 질투에 눈이 먼 동생은 자신을 위해 돈 벌려고 열심히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형을 오토바이로 쳤어. 형은 과다출혈로 그 자리에서 사망. 동생이라는 애, 자수해서 소년교도소에 있었는데 모범수라나 뭐라나, 여하튼 금방 풀려났어. 여기서 중요한 건, 종인의 형 준면은 동생이 자신의 애인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았고, 동생이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것도 알았어. 동생의 비밀을 알면서도 끝까지 모른 척 해준 셈이지.’ ‘그래서 네가 겨우 이 이야기를 하려고 시작한 이야기는 아닐 텐데?’ ‘빙고! 역시 우리 루는 눈치가 빨라. 진짜는 여기부터지. 형을 죽인 동생, 그리고 다 알면서도 죽어준 형. 이야기가 너무 시시하잖아? 형의 애인을 갖고 싶었던 동생의 소원도 들어줄 겸,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탄생할 것 같아 가상의 세계를 만들었지. 물론, 기억은 지워준 채로. 이 세계에서 형은 동생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어. 그러다가 동생의 비밀이 한 꺼풀 씩 벗겨져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자신이 이미 죽은 사람이란 것을 깨닫는 것이지! 하, 이보다 더한 희열은 여태 느껴본 적이 없어. 인간들은 가지고 놀기 정말 좋아, 그렇지 루?’ 첸의 말을 다 듣고 난 뒤에 루한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첸을 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첸은 홀로 신이 나서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곰곰이 생각해보던 루한은 조금 흥미가 생겨 아직 살아있는 동생과 형의 애인을 지켜보았다. 한참이고 구슬만 들여다보던 루한의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렸다. 루한은 고개를 들어 홀로 신나있는 첸을 불렀다. 루한을 향해 뒤 돌아본 첸은 장난기 어린 루한의 미소에 입 꼬리만 올려 웃으며 루한에게 다가섰다. ‘이야기가 더 재미있게 흘러가겠는 걸?’ ‘왜? 루, 뭘 본 거야, 어?’ ‘동생이라는 애, 방금 자살했어.’ 루한의 말을 들은 첸의 눈이 반짝, 빛이 났다. 그리고 곧, 루한의 의중을 알아차리고서 킬킬거리며 웃었다. 아직, 애인은 살아있지? 첸의 물음에 루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스러운, 그러나 어쩌면 더 비열해 보이는 미소를 지은 천사와 악마의 시선이 얽혔다. The real devil is behind angel's mask. 진짜 천사는 악마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둘 중 누가 천사일까요? 가족의 비밀 完 세훈x준면 w.BM 트위터(@BM_lastjoker) 개인홈(http://thelastjoker.dothome.co.kr/) 위 글의 배포는 자유이나, 무단 도용, 커플링 변경, 작가명 변경 등을 금지합니다. 글과 관련한 문의사항이나 질문이 있다면 트위터나 홈으로 찾아와주시길 바랍니다.